2007년 1월 7일

당시 실제 연인이었던 알랭 들롱과 로미 슈나이더
영화는 딱 이 네 사람간에 오고가는 함축적인 대사와 끈끈한 눈빛, 이 안에서 오고가는 심리전으로 흘러갑니다. 그저 친구 사이라는 해리와 마리안은 이상스러울만치 - 페넬로프가 역겨워할 만큼 - 다정해 보입니다. 페넬로프를 흘깃거리는 장-뽈의 시선은 처음엔 딱히 다른 의미를 품고 있지는 않아 보이지만, 해리와 마리안을 의식하며 점점 끈적해집니다. 해리는 유난스럽게 딸을 과시하며 한편으로는 슬쩍슬쩍 마리안에게 스킨쉽을 건네지요. 마리안은 딱히 거부하지 않습니다. 성숙한 몸과 분위기를 가진 페넬로프는 어른들의 시선엔 아랑곳없이, 무심하고도 조용하게 수영장을 거닙니다. 처음엔 물가에 가지도 않은 채 원피스만을 입던 소녀는 조금씩 몸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원피스 수영복, 그 다음엔 비키니 수영복 위에 해변용 자켓, 그리고 비키니 수영복. 페넬로프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공식적인 커플인 장-뽈과 마리안의 애정표현은 농도가 짙어집니다. 그 가운데 점차 페넬로프의 눈은 장-뽈을 향합니다. 이들은 각자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는 걸까요? 이 한가롭고 그저 시선으로만 교환되는 은밀한 욕망의 기호들은 어떤 사건을 예비해 놓고 있는 걸까요?
화면은 조용하지만 이들의 침묵 혹은 정겨운 '사교적' 말투 아래로 흐르는 심리적 대립은 꽤 격렬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아무 이상함이 없는 대화가 알고도 모르는 척, 혹은 모르지만 아는 척 떠보고, 말을 돌리고, 해야 할 말을 하지 않거나 하지 않아도 좋을 말을 굳이 하는 "파편적인 대화"라는 것은 이들의 눈빛, 작은 제스추어를 통해 표현됩니다. 영화의 후반, 넷이 모두 모여 먹는 저녁식사씬은 이 심리적 갈등이 가장 정점에 이른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별다른 대립도 뭣도 없는 이 장면은 화면 가득히 팽팽한 긴장으로 넘쳐납니다. 장-뽈, 마리안, 해리가 소리없이 벌이는 전쟁은 서로 탐색전과 떠보기와 아무렇지 않은 척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제 열여덟살인 페넬로프는 아무리 육체적으로는 성숙했다 한들, '어른들'의 이런 대화를 가엽게도 견뎌내지 못하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밥을 먹고, 식사 품평을 하고, 제스추어를 취하고, 교묘하게 말을 돌리는 장-뽈의 대화법은 가히 '도망자의 천재'라 할 만합니다. 하지만 가엾게도 페넬로프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시선은 오직 장-뽈에게 고정되어 있어요.

바로 이 장면. 인물별 바스트 원샷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전체샷으로.
이 조용한 전쟁은 결국 파국의 사건으로 이르게 됩니다. 술에 취한 채, 말하자면 이들 사이에 오가던 암묵적인 대화법의 관습을 깨고 그것을 '입에 올려버린' 해리에게 장-뽈은 폭발합니다. 영화 내내 조용하고 불안한 분위기를 유지하다가 막판에 커다란 사건으로 폭발하는 영화 설정은 지금도 그리 드문 건 아니지만, 이 영화는 1969년작이란 말이죠. 그런 식의 분위기를 유지하는 건 확실히 옛날영화가 더 잘 합니다. 요즘 관객은 영화의 2/3 이상이 소위 '따분한' - 그러나 그걸 과연 '따분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기저에 이렇게 격렬한 대립들이 오가고 있는데 말이에요 - 대사와 눈빛의 작은 기호로 진행되는 걸 못 참아하니까요. 하긴, 이 영화도 그래서 준비해 놓고 있는 게 육체의 향연이긴 합니다. 알랭 들롱의 단단한 육체, 제인 버킨의 미성숙과 성숙의 기호가 섞인, 가늘고 쭉쭉 뻗은 육체, 로미 슈나이더의, 매우 작고 동글동글하지만 관능적인 완숙미가 있는 육체. 특히 로미 슈나이더의 몸매는 제게 기묘한 경탄을 주었는데요. 그녀는 소위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글래머'는 아닙니다. 키가 굉장히 작고 아담해요. 가슴이 터질 듯 빵빵한 것도 아니고. 그런데 몸 곳곳에 작고 단단한 근육들이 붙어있고, 이것이 전반적으로 동글동글하면서도 다부진 인상을 주면서도 묘하게 관능적이더란 말입니다. 그에 비하면 제인 버킨의 몸매는 요즘 사람들이 선호하는 마르고 긴 체형으로 좀더 '모던'하다 할 수 있겠네요.

이태리 버전 포스터같습니다. 꽤 고전적(...)이죠.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
'과거사진상규명위' 카테고리의 다른 글
<自殺サ-クル (자살클럽)> <영진공 68호> (0) | 2007.02.04 |
---|---|
르네 클레망, <태양은 가득히>,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영진공 67호> (0) | 2007.01.25 |
비트...희망이 없어, 멋있던 기억.,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영진공 66호> (0) | 2006.12.31 |
[영진공 64호]<사형도수> 그리고 성룡 (1) | 2006.12.07 |
[영진공 64호]<랜드 앤 프리덤> (2) | 2006.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