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벌중앙조정위원회

<색, 계>, 그녀의 마음을 무너뜨린 한 마디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11. 15. 14:22



<색, 계>와 가장 유사한 영화로 <스타 워즈> 시리즈를 꼽고 싶습니다. 외세에 저항하는 반군들의 이야기이고 특히 홍콩 대학 출신의 젊은 스파이들이 목표물로 삼고 있는 매국노 이(양조위)가 다스 베이더의 포스를 뿜어대고 있기 때문이죠. 루크 스카이워커와 다스 베이더의 관계가 적대적인 관계에서 부자 관계로 전환되는 부분과(정확히는 부자 관계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지만요) <색, 계>에서 왕 치아즈(탕웨이)와 이의 관계가 단순한 남녀 관계 이상으로 발전한다는 점이 내러티브 구조 상의 유사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색, 계>와 <스타 워즈>를 비교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으십니까? 속 알맹이가 아니라 이야기의 골격이 그렇다는 얘깁니다.1)

역시나, 치아즈와 이의 격렬한 전쟁과도 같은 정사씬은 과감한 노출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예전에 <러쉬>(1991)라는 영화가 있었는데요,2) 영화 보다는 주제곡으로 사용된 에릭 클립튼의 Tears In Heaven이 큰 인기를 얻었더랬죠. 마약반 형사들이 범죄자들을 잡기 위해 스스로 마약 중독자가 되어간다는 얘기였는데요, 후반에 남자 형사(제이슨 패트릭)가 죽고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여자 형사(제니퍼 제이슨 리)가 홀로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조깅을 할 때에야 기다리던 주제곡이 나오더군요. 영화의 장면 중에 두 남녀 형사가 코카인에 취해 사경을 헤매는 장면이 나옵니다. 정사 장면도 있구요. 치아즈와 이의 정사씬을 보다가 <러쉬>에서 마약에 취한 두 남녀의 모습이 잠시 떠올랐습니다. 양조위와 탕웨이의 그 표정은 배우들의 연기, 그 이상이더군요. 두고두고 생각나게 될 명장면입니다.




이와 정사를 치르는 치아즈는 부모와 이성의 보살핌을 충분히 받지 못한 젊은 여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치아즈가 연기하고 있는 막 부인이라는 가상 인물이기도 하지요. <색, 계>를 보는 방법3) 중에 하나는 치아즈가 막 부인을 연기하는 영화 속의 영화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치아즈의 아버지는 혼자 영국으로 가 재혼을 해버립니다. 이때 버림받은 치아즈를 위로해주고 그녀의 눈물을 지켜봐준 존재는 룸메이트가 아닌 영화였습니다.4) 왕치아즈가 학생 극단에 참여하고 치기어린 아마추어 암살단 활동에 동참하는 이유도 자기 삶 속의 커다란 결손을 메우기 위함입니다. 치아즈는 자기가 영화 속에서 보았던 여인들을 따라 막 부인을 연기합니다. 완벽한 막 부인을 연기하기 위해서라면 처녀성을 버리는 일 조차 능히 해낼 수가 있습니다. 홍콩에서의 작전이 실패로 끝난 이후 치아즈의 3년은 아무런 배역도 맡지 못한 신인 여배우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생활의 고단함은 배우에게 독기를 품을 수 있게 해줍니다. 죽느니만 못한 삶에 대한 자기 인식은 이제 뭐든지 해낼 수 있다는 용기로 쉽게 치환되지요. 상해에서 새로운 작전의 개시. 다시 막 부인으로 캐스팅된 치아즈는 마침내 이와의 에로틱 멜러를 연기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치아즈와 이의 첫번째 정사 장면은 상당히 놀랍습니다. 그런 식으로 첫 정사가 이루어지리라 예상한 관객은 그리 많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장면을 통해 비로소 이의 캐릭터가 구체화되기 시작합니다. 아울러 멜러 장르의 컨벤션을 무너뜨리는 츠아즈와 이의 첫 정사는 다름아닌 두 개의 색(色)이 계(戒)를 두른채 맞부딪치는 첫 합입니다. <색, 계>는 계가 해체되고 각자의 색을 드러내게 되는 두 남녀의 이야기가 핵심입니다. 다스 베이더의 갑옷과 루크 스카이워커의 광선검 같았던 각자의 계를 손에서 놓치는 순간, 속살 보다 여린 치아즈와 이의 색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맙니다.5) 하나는 마지막 남은 인간성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생명으로서의 색이죠. 둘이 바뀌었다 한들 영화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똑같습니다. 두 남녀가 계를 두른채 시작해서 마침내 색을 드러내고, 그 색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고 만다는 이야기는 인간 보편의 경험담이기도 합니다. <색, 계>가 강한 호소력을 지닌 영화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멜러의 보편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전달하는 연출과 배우들의 역량이 관객들의 계를 해체시키고 색을 건드릴 만큼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양조위는 정말 오랫동안 좋아해온 배우이지만 <색, 계>에서는 정말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 놀랐습니다. 오죽하면 다스 베이더를 떠올렸겠습니까. 강아지 같았던 그 검은 눈망울이 짙은 회색 연기를 뿜어대는 광경이라니. 이가 상해의 관청 건물 내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는 그의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런 이에게 접근해가는 치아즈는 처음부터 계를 앞세우지 않았더라면 이에게 그런 농염한 눈빛을 보낼 일이 없었겠죠. 그리고 막 부인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고서야 그런 황홀한 표정이 나올 수가 없었을 겁니다. 살을 맞대면 마음이 저절로 따라가는 것만이 아니라는 건 치아즈의 막 부인 베드씬 연습 과정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의 계를 풀고 색을 열어젖히기 위해서 치아즈는 막 부인으로이긴 하지만 자신이 가진 색을 전부 쏟아 붓습니다. "내가 비명을 지르지 않으면 그는 절정에 이르지 않아요." 너무 많이 쏟은 색은 결국 막 부인이 아닌 왕치아즈를 움직이고, 이 영화에서도 다시 한번 모사는 새로운 실재로 전환됩니다.

완벽한 치아즈와 막 부인을 보여준 탕웨이는 신인이긴 하지만 확실히 그 이상의 역량을 가진 배우입니다. 하지만 연기력이 공인된 배우들조차 어떤 영화에서는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주곤 하는 것을 보면 배우들의 빛나는 연기는 역시 연출자의 몫이 큽니다. 말 그대로 디렉팅을 하든 배우가 스스로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도록 도와만 주든, 아니면 니 맘대로 한번 해보세요 완전히 풀어놓든, 배우의 캐스팅과 카메라 앞에서의 연기를 만들어내는 건 배우 스스로와 함께 감독이 하는 일입니다. 때문에 아무리 재능이 박한 연기자라 하더라도 명장을 만나면 뛰어난 연기를 보여줄 수도 있는 것이고 아무리 뛰어난 명배우라 하더라도 배우에 대한 통제력을 갖추지 못한 감독을 만나면 형편 없는 보릿자루 연기를 하게 되는 겁니다. 감독은 배우가 캐릭터를 제대로 살릴 수 있도록 그리고 그의 연기가 최대한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연기 지도 뿐만 아니라 조명이나 세트와 의상에 이르기까지 전방위로 영향을 미치는 조물주입니다. 양조위도 마찬가지지만 치아즈의 뛰어난 연기는 곧 이 안 감독의 연출입니다.




치아즈와 이의 색이 그 속살을 드러내는 부분은 침대 위에서만은 아니었습니다. 치아즈가 모국어로 노래를 할 때, 이의 계는 완전히 해체되고 색만 남게 됩니다. 남녀의 색을 넘어서 한 인간으로서의 색까지 점령당하고 맙니다. 시대는 두 사람을 적으로 만나게 했지만 인간의 색은 그렇게 만나는 법입니다. 그리고 이가 사랑의 증표를 치아즈에게 선물할 때, 치아즈의 계도 크게 흔들리고 맙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치아즈는 막 부인으로서의 연기를 포기할 수 없었죠. 막 부인이 맡은 역할은 이의 계를 해체하고 색을 완전하게 빼앗는 일이었지 자신의 색 때문에 계를 놓치는 건 아니었으니까요. 6캐럿 원석에 흔들렸던 왕치아즈를 완성된 '색' 있는 다이아 반지가 다시 한번 뒤흔드는데, 이때에도 치아즈는 마음의 부담감 때문에 손에 끼었던 반지를 서둘러 빼내려 합니다. 손에 끼고 다니다가 도둑 맞을까 겁난다는 핑'계'를 대면서요. 그런 치아즈를 완전히 무너뜨린 건 이의 말 한 마디였습니다.

"내가 지켜줄께."


그리고는, 우다다다. 대반전과 긴장의 풀림. 아무 것도 안들리는 멍한 순간. 이제 내 색은 어디로 가야 하는 건가. 처연하게 돌아가는 바람개비. 의미 없이 달아나려 해보지만 이미 갇혀버린 구역. 영혼의 바리케이트. 나도 저녁 밥을 짓기 위해 발걸음을 서두를 수 있는 저 아낙네처럼 살고 싶었건만... 어느 작은 구석 하나도 서투르게 배치하는 법이 없는 대가의 솜씨 그대로입니다. 이 안 감독의 <색, 계>는 그렇게 관객들의 계를 열어젖히고 각자의 색을 드러내놓게 만들고 있습니다.





1) 그럼 다스 베이더와 루크 스카이워커가 부자 관계도 아니면서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하는 새로운 버전의 <스타 워즈>는 어떠십니까? 쿠~ 쿠~ 내가 지켜줄께. 가요, 어서요. 두 연인은 새까맣게 몰려드는 적들을 향해 광선검을 휘두르다가 장렬하게 전사하며 불멸의 사랑이 되는 겁니다.

2) <슬리퍼스>(1996)에서 일약 주연을 맡기 전의 제이슨 패트릭과 제니퍼 제이슨 리가 공연했고 여성 영화제작자인 릴리 피니 자누크의 유일한 영화 연출작이기도 합니다.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1989)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면서 직접 연출까지 해볼 기회를 잡았던 모양입니다. 형사 액션물의 외양을 가진 영화를 그렇게 잔잔한 드라마로 바꿔버렸으니 쫄딱 망할 수 밖에 없죠.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무척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영화입니다.

3) 양조위가 연기한 이의 관점에서 설명해보는 것도 나름의 방법이긴 합니다만, <색, 계>는 치아즈의 입장에서 따라가는 편이 훨씬 일반적이라고 생각합니다.(더 많이 나오잖아요) 치아즈의 성장 영화, 치아즈의 사랑과 야망, 그외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주는 영화는 볼 때에도 좋지만 보고난 후에도 즐겁습니다.

4) 우리는 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마음을 단단하게 잘 묶어놓고 있다가 영화를 보면서 바보 같은 울음을 터뜨리곤 하는 걸까요. 삶 속에서 존재하는 또 하나의 계와 색입니다. 영화는 색이다!

5) 이 부분에서는 치아즈 보다 이의 상처가 더 커보입니다. 마지막 장면의 그 황량한 표정이란. 치아즈는 자신의 계를 손에서 떨어뜨릴 수 밖에 없을 만큼 이에 대한 색이 마치 댐을 무너뜨리는 거대한 물줄기처럼 쏟아져나왔던 거죠. 치아즈는 색이 상처를 받았다기 보다 색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놓는 쪽이라고 하겠습니다. 색이나 생명이나 그 근본은 같은 것이겠지만요.

6) 왜 여자에게 다이아몬드가 최고의 선물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색, 계>를 보면서 평생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심순애에 대한 김중배의 사랑도 여자의 마음을 사기 위한 돈 지랄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것도요. 이제 심순애에 대한 김중배의 사랑도 새롭게 조명되어야 합니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