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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창작위

[엽편] 가짜들


 
가짜들


 "가짜네요."
 "예? 설마요?"
 "제법 만들긴 했는데 가짜예요. 우린 안 삽니다."
 "말도 안 돼. 그건……."

 '그건 결혼 예물인데요' 라는 말을 못 잇고 꿀꺽 삼켰습니다. 시계를 준 전남편의 얼굴이 떠오르며 화가 치밀어 오른 것도 찰나, 고가 귀금속만 현찰로 매입하는 화려한 매장에 가짜 롤렉스 시계를 들고 간 것이 몹시 부끄러워졌으니까요. 얼굴이 달아올라 귀까지 화끈거렸습니다. 그러나 마흔쯤 돼 보이는 매장 주인은 별로 드문 일도 아니라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시계를 돌려주었습니다.

 "또 보여주실 게 있나요?"
 "아뇨."

 재빨리 매장을 나와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온갖 것을 처분하면서도 이 시계만큼은 품고 있었습니다. 시계를 채워주던 전남편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으면 한 가닥 애틋한 마음이 솟아오르기도 했거니와, 팔았을 때 몇 달 생활비가 거뜬히 되어줄 '비장의 카드'로 보관하고 있던 것입니다. 그게 가짜로 판명됐으니 이제 수중의 돈으로 얼마나 지낼 수 있을지 계산해 봐야 합니다.

 거리로 나오니 금세 몸이 떨립니다. 어쩐지 예물 팔러 나오면서 잘 갖춰입지 않으면 스스로 초라하게 느껴질까 봐, 갖고 있는 겨울 외투 중 가장 고급스러워 뵈는 코트를 걸치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옷은 갖고 있는 겨울 외투 중 가장 얇은 것이기도 했습니다. 한낮인데 어째 아침보다 더 추워진 것 같습니다. 코트 깃을 한 번 더 여미며 달리듯 걸었습니다. 지하철 역 입구로 입수(入水)하듯 뛰어들려는데-
한 남자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인상이 참 좋으시네요."
 "예?"
 "영혼이 맑은 분이셔요. 그런데 걱정이 많아 보이네요."
 "됐어요."
 "잠시면 됩니다, 아휴 추워. 아가씨가 걱정이 많은 이유가 있거든요. 아가씨 조상님들이 화가 나 있어서 앞길을 막고 있는데, 아 정말 춥네요. 저기 찻집에서 잠시만……."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돌아서던 나는 '춥네요… 찻집에서…' 라는 말에 순간 멈칫했습니다. 그대로 곧장 지하철을 타야 집밖에 갈 곳이 없었습니다. 남자가 가리킨 찻집은 아주 따뜻해 보였습니다.

 남자는 연신 '추워'를 연발했습니다. 얘기하는 걸 핑계삼아 빨리 찻집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남자와 찻집을 번갈아보며 잠깐 멈칫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남자는 내 팔을 끌고 찻집으로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인간의 영혼과 사후세계, 우주의 섭리와 기운, 조상과 후손의 관계 등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떠들어댔습니다. 언젠가 읽은 주간지 기사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역시나 슬며시 제사 이야길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상황이 좋지 않은 건- 어쩐 일인지 조상들이 아주 화났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혼한 걸 괘씸히 여겼나 보다. 제사를 정성껏 올려 그들의 화를 풀어줘야 한다. 그러면 나를 둘러싼 어두운 기운도 사라지고 운도 술술 풀리기 시작할 거다……. 내가 읽은 기사는 이런 말로 사람을 유인해 제사를 올리게 한 다음, 제사비용으로 터무니 없이 큰돈을 요구하는 치들을 경고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평소였다면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며 혀를 찼겠지만, 막상 속아주는 셈 치고 듣고 있자니 제법 흥미롭기까지 했습니다.

 얼었던 몸이 녹고 시간이 점점 흐르자 슬슬 배가 고파왔습니다. 나는 남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이제 어떤 핑계를 대고 일어나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제 말은, 제사를 지내시는 게 좋겠다는 거죠."
 "그런가요."

 건성으로 내뱉은 말에 남자는 미안할 정도로 반색했습니다.

 "그러믄요. 오랜만에 말이 잘 통하는 분을 만났네요."

 남자는 한시름 놨는지 탁자 가까이 바짝 붙였던 상체를 소파에 기대는가 싶더니,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떴습니다. 엉터리 제사상을 차려놓고 기다리는 한 패에게 전화라도 걸어두려는 것이겠지요. 뿌옇게 김 서린 찻집 유리창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이 틈을 타서 달아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어서며 핸드백을 집어드는데- 아까 화가 나서 대충 던져 넣은 시계가 보였습니다. 그동안 애지중지 보관해오던 시계 상자는 뚜껑이 열린 채 핸드백 구석에 박혀 있었습니다.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다시 소파에 앉아 상자를 꺼내, 예전처럼 보기 좋게 시계를 담았습니다. 까짓 거 남자를 따라가 볼까 싶어졌습니다. 남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큰 돈 들여 굿도 하던데요. 한복을 입고 제법 근엄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을 치들이 가짜들이란 건 알지만, 제사를 올려 마음이라도 편해진다면 밑져야 본전입니다.

 자리로 돌아온 남자는 내가 꺼내놓은 상자를 보고 이게 뭔지 묻습니다.

 "롤렉스예요."

 어리둥절한 기색의 남자에게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결혼 예물이었죠."

 남자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제 됐습니다. 누가 결혼 예물로 가짜를 주고받을 거라 생각하겠어요? 나는 곧 제사비용 대신 넘겨질 시계 상자를 아쉬운 체 쓰다듬으며, 잠시 후 제사상 앞에서 어떤 소원을 비는 것이 좋을까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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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도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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