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버전 포스터. 미국 버전보다 세련되다.
최근에 네오이마주에서 <해프닝>이 왜 공포영화로서 퀄리티가 떨어지는가를 분석하며 <식스 센스>를 라캉식 용어로 풀어내는 글을 봤다. <식스 센스>에 대한 좋은 분석이라 생각한다. <식스 센스>에서 느꼈던 것들 중 일부 막연한 것들, 지금까지도 언어로 제대로 풀리지 않은 것들이 마침내 적절한 언어를 만나 술술 풀려나가는 느낌이었다. 다만 그 밑에 달았던 리플에서도 보이듯, <해프닝>에 대한 분석에는 거의 동의하지 않는다. (실은 다른 영화에 대한 짧은 코멘트에도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글은 그 글에 대한 반박은 아니고, 그저 그 분의 글에서 힌트를 얻어 <해프닝>에 대한 내 감상을 정리하고자 한다.
<해프닝>은 M. 나이트 샤말란의 영화로는 최초로 미국에서 R등급을 받았다. 아무래도 영화 초반에 자해를 하는 모습에서 샤말란 영화로는 좀 낯선 고어 장면이 표현돼 있기 때문이다.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로 기억하고 있다)에서 어느 날 햇볕도 좋은 공원과 인근에서 갑자기 멍한 표정으로 자해를 해서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속출한다. 정부에서는 테러리스트의 화학공격을 의심하며 대피령을 내리고, 고등학교 생물교사인 엘리엇(마크 월버그)은 최근 사이가 급속히 나빠진 아내 엘마(주이 디샤넬)를 데리고 동료교사인 줄리언(존 레귀자모), 줄리언의 어린 딸 제스(애쉴린 산체스)와 함께 줄리언의 시골집으로 향한다. 그러나 중간에 기차가 서고, 승객 중 일부가 함께 움직인다. 그 과정에서 일행의 숫자는 서서히 줄어들고, 남는 것은 엘리엇과 엘마, 그리고 제스뿐. 엘리엇과 엘마는 제스를 마치 딸처럼 목숨걸고 보호하며 도망치지만, 결국 포기와 절망의 순간에 엘리엇과 엘마는 함께 죽음을 맞기 위해 죽음 앞에 선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내가 유독 인상깊게 봤던 씬은, 엘리엇 일행이 저 외딴 노파의 집에 고립되는 장면이다.
외딴집에 갇힌 일행. 이들은 원치않게 '결과적으로' 도움을 준 집의 탈취자가 돼버린다.
일단 모든 호러영화들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안온한 우리 세계를 침범하는 타인 혹은 우리 세계와 타인의 세계의 폭력적인 충돌을 다루기 마련이다. 다른 계급의 인간이든 이 계급의 일반적인 -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 윤리를 수용하고 있지 않은 인간이든, 귀신 혹은 좀비, 야생동물 혹은 외계인과 같은 비-인간 생명체든. 샤말란의 영화들 역시 그렇게 또렷이 구분되는 우리의 세계와 타인의 세계 사이에서의 틈입(<식스센스>), 혹은 폭력적인 충돌(<언브레이커블>, <싸인>) 등을 다루었고 때로는 타인의 폭력적인 침입(<싸인>, <빌리지>)을 얘기하거나 좀더 후반으로 가서는 한 영화 안에 (서로 단절된) 두 세계의 병존(<빌리지>)을 동시에 얘기하기도 했다. (<레이디 인 더 워터>는 안 봤으므로 건너뛴다.) 그런데 <해프닝>에서는, 만약 인간을 공격한 것이 '환경'이 맞다면, 이것은 인간에게 타자의 존재이면서도 인간이 함께 병존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온, 혹은 인간을 자기 안으로 포함하고 있는 그런 세계가 인간을 공격한 것이 된다. 그렇기에 그 공격이 '드러나는' 방식은 타인이 인간의 몸을 취하거나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제 스스로 자신의 몸에 위해를 가하는 형태가 되는 게 당연해 보인다. (여기에서 우리는 '환경을 해치는 건 결국 우리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라는 환경론자들의 경구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레이디 인 더 워터>는 논외로 하고) 이제까지의 샤말란의 영화가 다루었던 이야기와는 방향이 다소 다르다. 말하자면, 외부의 공격을 주로 다루었던 샤말란의 눈이 내부를 향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자면, 이것 역시 포스트-9.11의 여파이거나, 갈수록 지지율이 바닥을 치고있는 현 대통령을 둘러싼 사회적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반영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저 외딴 집 장면은, 엘리엇이 노파를 내쫓았다거나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던 것이 아님에도, 마치 밖으로 쫓겨난 노파가 집안으로 들어오려는 것을 엘리엇이 막기라도 하듯 노파가 집 사방의 외벽을 돌아가면서 머리를 찍어대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노파의 입장에서 보면 친절을 베풀어줬더니 그들은 집에서 살고 나는 죽는구나, 의 입장이 되는 것인데, 주인공인 피해자들이 도시인과는 다른 형태의 삶을 영위해온 다른 인간들에게 일종의 침입자이자 가해가 되는, 일종의 관계 역전, 혹은 '우리 세계' 안의 분열을 그리는 듯하여 매우 흥미롭다. 나는 이 장면에서 자연스럽게 <싸인>의 한 장면, 그러니까 외계인의 공격에 맞서 집의 문을 모두 봉하고 지하실에 숨어있던 멜 깁슨 가족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싸인>에서 외계인의 끔찍한 공격을 피하기 위해 '가장 안전한 곳'인 집, 그 중에서도 가장 구석에 숨으면서 밖으로의 공격을 철저히 차단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동시에 흡사 스스로를 집안에 가두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해프닝>에서 이 장면은 고립된 삶을 살고있던 노파가 집밖에서 변을 당한다. 우리의 주인공들이 변을 피하기 위해 집에 들어와 한 일이라고는 (그저 바람을 피하면서 바람에 문이 열리지 않도록) 문을 닫고 잠그는 정도였을 뿐. 게다가 이 외딴 집은 집과 헛간의 두 공간으로 분열되어 있고 엘리엇은 엘마 및 제스와 서로 분리된 공간에서 '관'을 두고 대화를 나누게 된다. 가까이 있으나 서로 단절돼 있으며, 같은 세계를 살아가나 서로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두 사람의 입장은,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요 공포와도 닮아 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이 죽음을 함께 맞기로 한 순간, 그러니까 한 세계 안에 서로 분리된 채 존재했던 두 세계가 서로 만나고 겹쳐지는 순간 죽음의 행렬이 멈췄던 것이 아닐까. 결국 <해프닝>은 서로 단절돼 있던 두 세계가 신뢰와 소통을 회복하는 것, 그리고 붕괴될 뻔한 가정이 하나의 단단한 가정으로 뭉치는 것(이것은 샤말란 영화의 일관된 주제이기도 하다)에 대한 멜러드라마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사실 샤말란의 영화는 언제나 외향상 공포의 틀을 취한다 한들 언제나 강한 드라마, 특히 멜로드라마였다. 심지어 <언브레이커블>도 그렇다. 처절하게 자신의 반쪽을 찾아헤매는 남자의 이야기가 아닌가. 그 점을 생각해 본다면, 이 영화가 결국 엘리엇과 엘마가 화해하고 사랑과 신뢰를 되찾으며 제스를 수양딸 삼아, 그리고 곧 태어날 아기까지 해서 다시 단단한 가정을 꾸리는 것으로 엔딩을 맺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기현상의 원인이 정확히 뭐였건 간에.
ps. 엘마 역을 맡은 주이 디샤넬은 알다시피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출연한 배우. 그의 부모가 워낙 J.D. 샐린저를 좋아해서 그의 소설 [프래니와 주이]에서 이름을 따와 붙여줬다고 한다. (나도 [호밀밭의 파수꾼]보다는 저 글라스 가에 대한 장단편 쪽을 더 좋아한다.)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타입으로 생긴 아가씨. 그런데... 80년생이라면서 갑자기 웬 주름살이 그리 늘었단 말이냐!!! 넌 아직 새파란 20대란 말이다!!!
'산업인력관리공단'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폭력의 역사 (A History of Violence, 2005) - "좋은 만듬새 ... 허전한 뒷 마무리" (0) | 2008.07.20 |
---|---|
"나도야 간다", 김수철 (1) | 2008.07.19 |
홍키의 시선으로 보는 "다찌마와리"와 "놈놈놈" (1) | 2008.07.07 |
[아이언 맨 (Iron Man)], 존 파브로 - "만들어 나가는 과정의 재미" (3) | 2008.07.04 |
두근두근 윤성호 (1) | 2008.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