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 거야~"
수컷 공작의 과시 쩌는 꼬리깃은 마치 3류 로맨스 영화 속 사나이의 순정과도 같다. 오로지 암컷을 꼬셔서 대업(?)을 이루겠다는 마음 하나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화려해서 눈에도 잘 띄고, 무겁고 거추장스러운데다 ‘공기역학이란 먹는건가요 우걱우걱’한 듯한 꼬리깃은 천적을 피해서 날기는 고사하고 뛰어서 도망가기조차 힘들게 만들었다. 초창기 진화론자들에게 이런 수컷 공작의 미련 곰탱이 같은 모습은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래서는 암컷을 꼬시기도 전에 천적의 한 끼 식사가 될 것은 뻔해 보이는데 대체 왜 수컷 공작은 이렇게 위험천만한 방식을 택한 것일까? 그리고 화려한 깃털을 택한 초창기의 수컷들은 대부분 쉽게 천적들에게 잡아 먹혔을텐데 어떻게 이런 비실용적인 부분들이 진화한 것일까?
현재의 진화론은 ‘생존’이란 것도 결국 번식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에 따라 수컷 공작의 꼬리깃은 생존보다는 번식에 더 치중한 결과이다. 최근엔 꼬리깃의 화려하고 대칭적인 무늬는 암컷에게 보다 건강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어필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공작새 수컷의 진짜 속사정이야 어찌됐건 이러한 논의들의 당연한 전제는 수컷의 꼬리는 암컷을 꼬시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누구도 이 점에 관해서는 의심치 않았으며 관찰을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세이어 형님에게 그건 개풀 뜯어 먹는 소리였다. 세이어의 눈에는 수컷 공작의 꼬리란 위장을 위한 것이었다! 열 번 떠드는 것 보다 한번 jpg파일을 보여주는 게 낫다고 했던가. 세이어는 자신의 주장을 알아먹지 못하는 우매한 이들에게 직접 그림을 그려 눈앞에 펼쳐 보였다.

그런데 공작 수컷이 그토록 위장이 잘 되어 있다면, 칙칙한 암컷은 그렇지 못하다는 말일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반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이어를 영구히 조롱거리로 만든 작품은 공작이 아니라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위장한” 채 호수에서 먹이를 찾는 홍학들을 그린 것이었다.

White Flamingos, Red Flamingos: The Skies They Simulate, 1909
"전통적으로 '눈에 확 띄는' 이 새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체색을 통해서 완벽하게 자신을 지운다. 그들은 사람이 으레 그들을 보는 위치인 위에서 보았을 때는 대부분 눈에 잘 띄지만, 그들의 체색은 이른 아침과 저녁의 붉게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소실되는'데에 경이로울 만큼 적합하다." (Thayer)
도대체 홍학들은 왜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사라져야 하는걸까? 그저 머릿속이 아득해져 온다.


그림은 정말 잘그렸는데 .....
실제로 헤리코니드 종은 아주 강한 냄새를 풍기며, 몸이 잘리면 강한 냄새의 체액이 나온다. 이 체액은 피부에 닿으면 염증을 일으킨다. 헬리코니드는 시계꽃passiflora종의 꽃만을 먹는데 이 꽃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시안화물을 포함한 독소를 만들어낸다.
헬리코니드는 이 꽃을 먹음으로써 유독한 성질을 획득한 것이다. 이렇게 비장의 무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나비들이 포식자들에게 잡혀 비명횡사하는 순간에도 헬리코니드 종 나비들은 자유롭게 꽃밭을 노닐 수 있었다.

그런데 아마존에는 헬리코니드와 비슷한 무늬를 가진 레프탈리스Leptalis 나비가 있다. 이 나비는 상대적으로 맛이 좋기 때문에 포식자들이 환영하는 나비였다. 본의 아니게 맛있게 태어난 이 나비들은 난처해졌다. 힘이 센 것도 아니요 독이나, 침이 있는 것도 아니니 뭐든 하지 않으면 종의 생존 자체가 위태로워질 판이었다.
그래서 이 나비들이 택한 것은 의태였다. 맛대가리 없는 헬리코니드의 무늬를 따라함으로서 포식자가 자신들을 맛대가리 없는 헬리코니드라고 착각을 하게 만든 것이다. 오늘날 이 이론은 당시 연구했던 과학자인 베이츠의 이름을 따 ‘베이츠 의태Batesian mimicry’라고 부른다.
즉, 맛이 없거나 독이나 침 등의 무기를 가지고 있는 거친 녀석들의 무늬와 색깔을 흉내내어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을 일컫는다.


당연히 세이어는 의태 개념에 아예 관심이 없었다. 그는 헬리코니우스 무늬도 경고색이 아니라 앉아 있을 때 잎으로 위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나비 따위가 어디서 건방지게 경고색 따위를 가지고 있겠느냐고 생각했다.
게다가 맛이 있는지 없는지 누가 판단을 한단 말인가. 발끈한 세이어는 1903년, 베이츠의 의태 이론을 논박하겠다는 목적으로 가족을 데리고 헬리코니우스가 있는 섬으로 탐사를 갔다. 그의 딸 글래디스는 이렇게 적었다.
(중략) ... 아버지는 실제로 나비들을 맛보았는데, 맛에서 아무런 차이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의 행동거지가 얄미워도 분명한 점은 세이어는 입만 싼 멍청이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건방을 떠는 와중에도 그는 위장의 또하나의 메커니즘인 분단색disruptive coloration 이론을 발견하였다.

사물마다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윤곽은 그 사물을 알아차리는데 쉽고 간단하면서도 매우 큰 정보를 준다. 만약 원시인이 길을 가다 사자를 마주쳤는데 이게 내가 기억하는 사자인가 싶어서 그 생김새를 자세히 관찰하고 있다간 단숨에 뼈와 살이 분리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멀리서도 이놈이 사자인지 아님 내가 사냥해야 할 사슴인지 빠르게 알아채야만 했다.
이때 사물의 고유한 윤곽은 멀리서도 그 사물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래서 많은 동물들이 본능적으로 사물의 윤곽을 기억하고, 자신이 아는 사물의 윤곽과 끊임없이 비교한다. 은폐색의 메커니즘은 바로 이 윤곽을 없애는 것이다. 배경과 비슷한 색깔과 무늬를 이용해 자신의 윤곽을 배경과 섞어 버림으로써 눈 앞에서 사라지는 착시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큰 동물과 작은 동물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작은 동물일수록 윤곽을 없애는 것은 쉽다. 게다가 그들은 종종 오랜시간을 꼼짝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큰 동물은 다르다. 커다란 형체가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윤곽들은 왠만해선 은폐하기 힘들다. 그들이 제아무리 노력해도 대부분은 바로 들키고 말 것이다. 그래서 큰 동물들은 작은 동물과는 다른 메커니즘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분단색이다. 분단색은 어떤 의미에서 방어피음이나 위장색과는 정반대이다. 분단색이란 커다란 윤곽을 없앨 수 없다면 상대가 인식하기 어렵게 윤곽을 임의적인 덩어리로 쪼개는 것이다.

납작한 머리가 들쑥날쑥한 두 덩어리로
쪼개지고굵은 밧줄이 등을 따라서 뚜렷이 뻗어 있는 것 같다.
사실 꼭 그렇지는 않은데, 생물학은 예외의 사례로 가득한 과학이다. 생물들의 무늬 역시 위장의 기능 뿐만 아니라 경고색이나 의태(다른 동물의 무늬를 모방하는 것) 기능을 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세이어는 위장을 제외한 다른 주장들을 돌파리 의사의 처방전으로 보았다. 스컹크나 말벌과 같은 동물들의 무늬들도 경고색이 아닌 위장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말벌은 햇빛과 그늘에 잠긴 녹색 식생과 노란 꽃이라는 평균 배경에 놓일 때 근원적으로 그리고 아주 철저히 지워진다." (Thayer, 1909)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여야 하지만 세이어는 숙이기는 커녕 고개를 바싹들고 끊임없이 떠들며 상대를 무시하고 자기 과시를 하는 밥맛 중에도 ‘상밥맛’이었다.
당연히 이런 행동거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러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키는 법이다. 세이어는 세계적으로 자신의 적들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피터 포브스 저, 이한음 역, [현혹과 기만], 까치, 2012
영진공 self_fish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자를 좋아한 화가의 생물학적 발견, [3부] (2) | 2012.10.26 |
---|---|
소행성의 예상궤도가 산으로 간 까닭은? (0) | 2012.09.21 |
애플의 1차전 완승, 요인과 향후 전망 (1) | 2012.08.28 |
플래시의 죽음 (0) | 2012.08.27 |
여자를 좋아한 화가의 생물학적 발견, [1부] (0) | 2012.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