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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공관소식

"잉그리드 버그만"의 후회하지 않는 사랑

오늘 본 히치콕의 영화 <오명 notorious> 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않고 잉그리드 버그만의 옆모습이 나오는 모든 장면을 꼽을 것이다. 1940년대, 헐리우드에서 여신으로 불렸던 스웨덴 출신의 전설적인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 그의 이름을 구글 창에 놓고 두드려봤다. 또로로 올라오는 수 많은 정보 틈에 내 눈길을 사로잡은 뉴스 하나가 있었다. ’사랑과 불륜의 경계에 선 잉그리드 버그만’

남편과 11살난 딸을 두고 로마로 떠나다..

“만약 당신이 영어를 매우 잘하지만, 이탈리아어는 그저 ‘사랑해 ti amo’ 밖에 모르는 스웨덴 여배우가 필요하다면, 나는 언제든 그곳으로 가서 당신과 영화를 찍을 준비가 되어 있어요.”

1948년 뉴욕의 맨하튼에서 잉그리드 버그만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거장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 를 본 후, 로셀리니에게 편지를 쓴다. (버그만은 로셀리니의 영화를 본 직후부터 그를 사랑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 뒤 1949년 8월 버그만은 남편과 열한 살의 딸, 그리고 팬들로부터 누렸던 온갖 인기와 애정을 포기하고 이탈리아 로마로 달려간다. 로셀리니와 버그만의 사랑은 이렇게 시작된다. 각자 배우자가 있는 상태였지만, 함께 한 첫 영화 <스트롬볼리>를 촬영하는 동안 두 사람은 아이를 가졌다. 버그만은 미국 팬들에게 타락한 우상이라는 거센 비난을 받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1950년 5월 24일 멕시코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다시 태어나도 같은 길을 가겠다."

로셀리니는 자신의 아내이자 영감의 원천인 버그만을 데리고 <유로파 51>, <이탈리아 여행>, <공포> 등의 영화를 차례로 완성해간다. 하지만 잇따른 상업적 실패로 인한 재정적 어려움은 버그만을 지치게 만들었다. 결국 버그만은 로셀리니를 떠나 1956년 장 르누아르의 <엘레나와 남자들>을 찍은 후 할리우드로 돌아갔다. 이후 잉그리드 버그만은 헐리우드에서 성공적으로 재 데뷔 하고, 로셀리니는 인도로 떠난 뒤 영화와 결별하고 다큐멘터리에 몰두한다. 이렇게 이들의 열정적인 사랑은 7년 만에 막을 내리지만, 버그만이 자신의 65살 생일 날 남긴 말은 그들의 사랑이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내가 불륜을 저지르는게 아니라 사랑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후회는 없다. 정말 멋진 생을 살았다. 비난이 있었지만,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는 같은 길을 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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