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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과학수사연구소

"슈퍼 히어로의 정치학", "킥 애스"가 보여주는 시민의식




 

 

 

“보수”란 당대의 사회 시스템을 인정한다는 말이며 지배체제를 인정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는 결코 ‘옳다’, ‘그르다’로 재단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한 시스템은 적어도 그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한 질서의 유지 측면에서 이해되고, 이 ‘질서’는 결국 사회 구성원들의 행동의 안정성을 담보해주는 것이기에 큰 의미를 가집니다.

 

한국 사회에서 살인은 5년 이상 ~ 무기, 또는 사형의 처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살인을 최대한 꺼리게 되겠죠. 하지만 사회가 자신을 지속가능할 정도의 동력을 상실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이런 규칙을 슬금슬금 어기게 될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았을 때, 사회체계를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회구성원들이 만들어놓은 규칙을 최대한 잘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보수는 과연 그럴까요? 대한민국 형법 31조는 살인교사를 살인 행위자와 같게 처벌할 것을 요구하지만, 20명 이상을 죽인 유영철은 잡힌 즉시 신속하게 사형 판결이 나온데 비해, 어떤 이들은 십 수 년이 지난 후에야 가까스로 사형을 언도받고 결국 사면받습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나오는 것일까요?

 

 

 

 

국가가 자신의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야만 합니다. 그 중 하나가 피치자들에게 권선징악의 이데올로기를 심어놓는 것이죠. 하지만 생각해보면 착한 일을 한다고 꼭 복을 받는 것도 아니고, 나쁜 짓을 한다고 꼭 벌을 받는 것도 아닌 게 현실입니다.

이 때 지배자가 등장합니다. 지배자는 “하늘을 대신하여” 처벌을 내립니다. “하늘을 대신”한다고는 하지만 까놓고 보면 이는 자신의 지배 시스템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죠.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생깁니다. “하늘을 대신한다”는 증명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죠. 이 때문에 지배자는 자신의 출신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냅니다. 국가의 지도자들이 “하늘”에서 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늘”은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다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의 눈을 빌면, 그들에게는 모르는 것이 없겠죠.

그래서 그들은 “하늘을 대신한 응징”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응징”은 일정 정도의 홍보효과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태고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처형은 하나의 축제, 혹은 구경거리와도 같은 성격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런 ‘일벌백계’를 통해 시스템의 유지가 가능했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런 관행을 수퍼맨과 배트맨에서 봅니다. 수퍼맨과 배트맨은 악당을 죽이기도 하지만, 피치못한 경우가 아니라면 악당을 경찰서나 교도소에(재판도 없이!) 쳐 넣습니다. 담벼락이나 기둥에 묶기도 하지요.(사실 제대로 그들을 넣었다 해도 현실이라면, 입증문제로 인해 영화에서처럼 간단하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군요. 비합법적 수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는 게 슈퍼 히어로 무비의 세계니까요.)

 

조용하게 해결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상징하는 코스튬과 온갖 퍼포먼스를 이용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홍보”를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는 보이지 않지요. 그들의 정체는 ‘시스템’을 의인화한 것입니다. 사회를 지배하는 시스템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최소화합니다.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그들의 탐지를 피할 수 있는 증거가 되기도 하니까요. 게다가 정체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비난받을 일도 없습니다. “세상이 이 지경인데 수퍼맨은 뭐 하는 것이냐?”라는 푸념에도 클라크 켄트는 어디에도 없지요.

결국 수퍼히어로란 계몽주의의 산물인 셈입니다. 그들은 완벽하며 강하고 인간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말하는 것은 모두 진리가 되었죠. 마치 성서의 모든 문구가 진리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 논파의 방법에 불과합니다. 고대에는 국왕이 신의 아들임을 역설함으로써 지배이데올로기를 공고화했다면, 근대는 지식을 통해 상대방을 복종시키는 형식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지배체제를 강화했습니다. “계몽”은 개인을 위한 것이기 전에 국가를 위한 것이었고, 이는 한글의 필요성과 용비어천가를 통해서도 매우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이죠.

 

 

 


허나 아무리 영웅이 훌륭하다 할지라도, 한 사람의 영웅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겁니다. 수퍼맨이 지구를 사랑한 것은 지구가 그나마 그럭저럭 돌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시민사회의 단결이 흐트러지지 않은 세상이니까요. 그런데 이런 면에서 볼 때, 재미있는 히어로가 있는데 바로 "킥 애스"와 "스파이더맨"입니다.

스파이더맨 2편의 피터 파커는 지하철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정신을 잃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어린 아이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하철의 시민들은 모두 그를 구하기 위해 모여들고, 심지어는 악당에게 도전하기도 합니다. 영화가 영화니만큼 폭력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는 킥애스라는 영화를 보면 얘기가 좀 달라지게 됩니다.

 

킥애스의 주인공은 “왜 세상이 이렇게 되었냐”라는 탄식에서 별 능력도 없는 주제에 수퍼히어로 짓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진짜 수퍼히어로를 만나게 되죠. 하지만 세상을 바꾼 것은 힛걸 한 사람이 아니라, 수퍼히어로 모임이었습니다. 사회에서는 그저 평범한 혹은 평범 이하의 힘을 가진 Loser들이었지만, 그들이 힘을 모으자 그들은 더 강해졌습니다. 아픔과 피해도 있었지만, 승리를 쟁취한 것은 ‘시민들’이었죠.

 

 

 

 

이렇게 “연대의 승리”라는 면을 잘 보여준 게, "반지의 제왕" 2편입니다. 각 종족들은 처음에는 “나완 상관없다.”는 식으로 연대를 거부하지만, 이웃의 피해를 보고 그 피해가 자신들의 일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연대해서 승리하지요. 그래서 반지의 제왕은 멋진 정치 드라마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합니다.

현실로 돌아와보면, 우리는 삶의 주체이긴 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주변부의 존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엘리트도 중심부의 인물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짜 주변인일까요? 주변인인가 아닌가는 주체가 서는 곳에 따라 다를 뿐입니다. 나의 삶은 나에게 있어서 중심입니다. 아무리 ‘그들’의 수퍼웨펀이 나를 한순간에 제거할 수 있다 할 지라도, 내 삶의 주체는 결국 ‘나’이지요.

프랑스 혁명 이후 왕권은 땅에 떨어지고 여러 부침을 거쳐 그들이 갖는 권위는 신분적 권위가 아닌 직업인으로서의 권위에 불과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공주님’에게 절하는 사람들도 없고, ‘악수’를 거절하는 정치가도 없습니다. 사회의 자원을 많이 가진 자들에게는 오히려 의무만이 있을 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시스템은 잘 굴러가며, 오히려 여러 국가들의 모범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그 동력이 ‘시민의식’에 있다고 봅니다. 그게 아주 대단한 것이 아닌, 규칙을 지키려 애쓰고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인식하는 속에서 자신의 권리를 챙기는 의식이죠.

 

최근의 영웅물 중 이 ‘시민사회’ 부활을 부르짖고 있는 것이라면 저는 "스파이더 맨"과 "킥 애스"를 꼽습니다. 옳지 않은 자들에게 옳은 자들의 연대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우리 사회의 수퍼히어로가 가지는 의미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슈퍼 히어로가 대개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 존재임에도 인기가 있는 이유는 매우 당연하게도 그들이 “제대로 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강하지만 자신의 힘을 타인을 억압한다거나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남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자칭 타칭 "보수"라 불리는 이들의 모습은 과연 어떤가요?

 

 

 

영진공 바보아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