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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창작위

[엽편] 할머니와 콩

수서행, 수서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선 안쪽으로 한 걸음 물러서야 합니다.
열차가 들어오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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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이미 안전선 안쪽에 있습니다.
더 없는 안쪽에서 하루종일 안전합니다.

까놓은 콩은 이미 많아, 한 움큼씩 비닐 봉지에 담아 두었지만
굳이 새 콩깍지를 집어 들었습니다.
까는 시늉이라도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금방 깐 신선한 콩 같으니까요.
할머니 무릎에 덮은 담요 위로
자줏빛 콩이 후두둑, 서너알 떨어집니다.

떨어지는 콩 너머로

뽀얗게 먼지 앉은 헌 구두가 지나갑니다.
반짝반짝 금빛 굽 뾰족구두가 지나갑니다.
뒤축이 닳은 운동화가 빠르게 지나갑니다.
이맘때 신기엔 영 추워 보이는 고무 슬리퍼가 더 빠르게 지나갑니다.

지하철이 신발들을 싣고 출발합니다.
띠릉띠릉, 떠나는 소리도 멀어지는데
삑삑, 다른 소리가 들려옵니다. 불빛도 보입니다.
아. 걸을 때마다 삑삑 소리와 함께
빨간 불이 들어오는 작은 운동화입니다.
로보트가 그려진 저 운동화- 아가신은, 갈색 구두와 함께 저만치서 멈춰 섭니다.

할머니는 오래 전, 이 자리에서
아가신을 처음 본 날을 떠올립니다.
딸이 어렸을 땐 저런 신발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귀여운 소리를 내는 저 신발을 보자마자
손자에겐 꼭 저런 신을 사주고 싶어졌던 겁니다.

삑삑, 삑삑,

아기가 걸을 때마다 소리가 날 겁니다. 깜박깜박 불도 들어올 겁니다.
아기는 신이 나서 발을 자꾸 내딛고
어쩜 더 일찍 달리기 시작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하하하하하, 어른들은 웃으며 박수를 칠 겁니다.
까르르르르르, 아기는 답례하듯 환하게 웃을 겁니다.
하하하하하하
까르르르르르
하하하하하하
까르르르르르

"콩이 다 텄다, 텄어."

까만 구두가 다가오는가 싶더니 혀를 차며 멀어집니다.
할머니는 구두가 가리키고 간 봉지를 들어 살펴봅니다.
구두 말대로 봉지 안에 들어 있는 콩마다 하얀 뿌리를 내밀었습니다.
김 서린 봉지 안에 며칠이나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콩은 아무도 사지 않습니다.

"딴에 살아 있는 놈들이라고."

속상해진 할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그 봉지를 맨 아래 숨겼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막 들려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습니다.

"갑갑해요."

할머니는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를 보고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긴, 누구든 간에 이곳에서 할머니에게
"얼마예요?" 도 아니고
 "갑갑해요" 같은 말을 건넬 리가요.
누군가 전화통화를 하며 지나갔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요즘은 그런 일이 많으니까요.
그런데 다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할머니, 여기에요."
"으응?"

할머니는 깜짝 놀라 아래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콩을 담아놓은 봉지에서 소리가 들려온 것이 분명했습니다.

"우리예요. 봉지를 좀 열어주세요."

할머니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아직까진 지하철역에 앉아 콩을 팔 정도는 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결국 치매가 온 걸까요. 콩이 말을 걸어오다니.
치매가 시작된 게 맞다면, 당장 집에는 어떻게 가나요.
어찌어찌 집에 간대도 낭패인 것은 여전합니다.
그때부터 할머니를 돌볼 사람이 없으니까요.

할머니는 겁에 질려 있었지만, 봉지가 조금씩 들썩이자
일단 매듭을 끌러 보기로 했습니다.

"
고맙습니다."

벌어진 봉지 사이로 뿌리 내린 콩들이 보였습니다.
콩들은 밝게 웃으며- 콩이 웃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할머니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말했습니다.

"봉지를 너무 꽉 묶어서 갑갑했어요, 할머니."
"에그머니."

할머니는 조금 전보다 훨씬 무서워져서, 앉은 자세 그대로 뒤로 넘어질 뻔 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이내 숨을 고르고 봉지를 노려보았습니다.
짖궂은 누가 장난을 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까- 열 걸음 떨어진 곳에서 장난감을 팔고 있는 남자에게
콩을 봐달라고 부탁하고 화장실에 다녀왔거든요.
할머니를 놀려주려고, 그 남자가 몰래 작은 장난감을 넣어두었는 지도 모르니까요.
할머니는 봉지를 뒤적거려 보았습니다. 하지만 봉지 안엔 온통 콩, 콩, 콩 뿐이었습니다.

"죽을 때가 됐구나야."

할머니는 탄식하며 중얼거렸습니다. 그 때 콩들이 다시 웃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엔 소리까지 분명하게 들리는 웃음이었습니다.

하하하하하하
까르르르르르

할머니는 콩들의 웃음 소리에 마음이 갑작스레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편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콩들이 웃는 듯 보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소리를 내며 웃는 편이 훨씬 사실적이었으니까요.
할머니는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콩들의 웃음을 듣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는 사람들을 의식하며, 콩 밖에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게 속삭였습니다.

"니들이 말하는 거냐? 거기서?"
"네, 네."
"콩이 어떻게 말을 하냐?"
"지금 하고 있잖아요."

하하하하하하
까르르르르르

콩들은 하얗게 튼 뿌리를 흔들며 다시 웃었습니다.
할머니는 어처구니가 없어 함께 웃었습니다.
콩이 미치거나 할머니가 미치거나, 둘 중 하나인 거라 생각했습니다.
콩이 미칠 리야 없으니 할머니가 미친 게 분명했습니다.

"야야, 정신이 없는 게지."

할머니는 힘없이 중얼거렸습니다. 오늘은 이제 자리를 접어야할 듯요.
집에 가서 한숨 푹 자고나면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할머니는 까다 만 콩깍지와 까놓은 콩, 이미 봉지에 담아놓은 콩들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이 작고 귀여운 아가신도, 새로 도착한 지하철을 타고 가버렸습니다.

"참말로. 손주눔 꼬까신도 못 사주고 죽을라나."
"사주세요, 사주세요."

할머니는 콩들이 내는 소리 따윈 이미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할머니가 깜짝 놀라거나 의심한다고 안 들릴 소리가 아니란 걸 깨달았으니까요.
할머니는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눔들이 뭘 안다고 나불거리냐. 어차피 손주눔이고 딸이고 인제 못 보고 죽을 팔자다."
"보세요, 보세요."
"보면 되죠, 보면 되는데."
"못 보니까 못 본다지! 내가 못 본다는데 뭘 안다고 나불거리냔 말이다."

할머니는 울컥 화가 난 바람에, 큰 소리로 콩들을 꾸짖고 말았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흠칫 놀라며 지나갔습니다.
할머니는 다시 작게 중얼거렸습니다.

"난 갸를 이해 못한다. 갸도 나를 이해 못한댔다."

하하하하하하
까르르르르르

콩들은 뿌리를 크게 떨며 더 크게 웃었습니다. 너무 크게 웃어 봉지가 마구 흔들릴 정도였습니다.
누군가 할머니를 지켜보고 있었다면- 할머니가 손을 떠는 줄 알았을 게 분명합니다.

"어차피 우리는요, 서로를 전부 이해하진 못한대요."

할머니는 주름진 입을 오므리며 호호 웃었습니다.

"누가 그러디?"
"새들이요, 지렁이가요, 우릴 키운 아줌마가요."
"니들이 이해한단 게 뭔지나 알고 그런 소릴 하니?"
"그럼요. 우린 서로를 전부 이해할 수 없대요."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사이는 없대요."
"새들은 새들끼리도 이해 못해요."
"지렁이도 새들을 이해 못하죠."
"우릴 키운 아줌마는 어떤 아저씰 이해 못했어요."
"그래도 다 같이 살아가요."
"모든 걸 다 이해할 수 있는 사이는 없거든요."
"보세요, 보세요, 할머닌,
말할 수 있는 우릴 앞에 두고도 우릴 이해 못하시네요."

할머니는 보따리 싸던 손을 놓고 허리를 폈습니다.

"……
평생 안 본댔는데. 우리 딸이 날."
"보세요, 보러 가세요."
"보고 싶었다고 하세요. 꼬까신도 사 가세요."

하하하하하하
까르르르르르

할머니는 콩들과 함께 웃기 시작했습니다.

"니들이 역시 어둔 땅속에서만 자라놔서, 사람 속을 모르는 거라.
얼마나 복잡한 지 모르는겨. 사람 속이란 걸 말여.
역시 니들은 이해하기 어려운겨."

하하하하하하
까르르르르르

콩들은 할머니의 말을 이해했는 지 아닌 지 계속 웃기만 했습니다.
할머니도 이제 마음놓고 껄껄 웃기 시작했습니다.
웃음보가 제대로 터진 바람에 주위 사람들을 신경 쓸 수도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콩들을 크게 꾸짖듯- 그러나 다정한 손길로 봉지를 되도록 헐겁게 여미며- 말했습니다.

"뿌리 내민 니들 때문에
신발 살라믄 며칠 더 걸리게 되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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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도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