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의 과자

초겨울이었습니다.
나는 평소처럼 동네 뒷산에 올랐습니다.
점심 식사 후에 혼자 산을 오르는 것이 거의 유일한 취미였으니까요.
한 시간 남짓 천천히 산길을 걷다가
적당한 나무 그루터기가 보이면 잠시 앉아 쉬기도 하고,
푹신한 솔밭에 슬쩍 누워 보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날도 나는 익숙한 오솔길을 걸었습니다.
이른 오후의 햇볕이 제법 따가웠지만
명색이 겨울의 초입인 만큼, 공기는 차가웠지요.
나는 뺨에 닿는 맑고 차가운 공기를 만끽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습니다.
산의 중턱쯤 올랐을까요.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졌습니다.
조금 전까지 파랗던 하늘은 이마 바로 위까지 시커멓게 내려 앉았습니다.
금세라도 비가 쏟아질 듯 하여, 나는 산책을 일찍 접기로 하고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익숙하던 길이 그날따라 너무 낯설게 여겨졌습니다.
마을로 내려가는 길을 찾아 걸어보아도,
이내 처음 보는 낯선 풍경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옛다!' 하면서
내 앞에 새로운 길을 자꾸만 펼쳐놓는 것처럼 말이지요.
기어이 비가 쏟아졌습니다.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을 원망하며 나는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산은 밤처럼 어두웠습니다.
그리고 달리고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그 작은 동네 뒷산에서
완전히 길을 잃은 것이었습니다.
옷은 젖은 지 오래였습니다.
추위와 당혹감으로 갈팡질팡하고 있던 그때
숲 저편으로 희미한 불빛이 보였습니다.
그동안 매일같이 산을 오르내리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던 작은 집이 나타난 것이지요.
달리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던 나는 그곳을 향해 달렸습니다.
끼익-
노크도 하지 않고, 나도 모르게 서둘러 문을 열어 버렸습니다.
스웨터를 입은 긴 머리 아가씨가
동그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길을 잃었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사내를 보고 아가씨가 두려워 할까 봐
나는 서둘러 자초지종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아가씨는 내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진 않았습니다.
아가씨는 듣는 둥 마는 둥한 기색으로
마른 수건을 내게 건네 주었습니다.
그제서야 내 몰골이 말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어여쁜 아가씨 앞에 그런 꼴로 서 있다는 것이 몹시 부끄러워져서,
푹 젖은 외투와 셔츠를 벗어 의자에 걸어놓고
빗물을 닦아내었습니다.

기분도 한결 나아졌습니다.
그렇게 숨을 돌리고서야, 그 집 안에
과자 냄새가 가득하다는 것을 인지했네요.
밥을 먹고 오른 산길이었지만, 겁에 질려 한참을 뛰어다녔기 때문에
이미 배가 고픈 상태였습니다.
아가씨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그러나 여전히 무심히-
탁자 위의 쟁반을 가리켰습니다.
"드셔도 좋아요."
아아. 그것은 내가 먹어 본 과자 중
가장 맛있는 과자였습니다.
'달콤하면서도 고소했다, 부드러운가 싶으면서도 바삭했다!'
따위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훌륭한 맛이었으니까요.
나는 자꾸만 과자를 집어 먹으며 그것이 무슨 과자인가 물었습니다.
아무리 비싼 것이라 해도, 언젠가 꼭 다시 한 번
그 과자 생각이 간절해질 게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가씨는 엉뚱한 대답을 했습니다.
"내 마음이에요."
"네?"
"그 과자는요, 내 마음이에요."
맙소사. 나는 유머 감각이 없는 축에 듭니다.
게다가 능청스러운 성격도 되지 못하죠.
그러니 아가씨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 지
이럴 땐 어떤 말로 멋지게 받아쳐야 하는 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아가씨는 쑥맥처럼 머뭇거리는 나를 흘깃 보더니
나직한 어조로 말을 이었습니다.
"내 마음은 과자가 된답니다. 언젠가부터 과자가 되고 있어요.
나는 매일 과자를 구워요.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지만."
순간 나는 들고 있던 과자를 내려 놓았습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며 정신이 아득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슬픈 기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습니다.
영문을 몰라 괴로웠지만, 곧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먹은 과자는 정말로- 아가씨의 마음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아가씨가 느꼈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낀 것이었지요.
비는 여전히 세차게 내리고 있었습니다.
몇 시나 되었는 지 짐작도 할 수 없었죠.
나도, 아가씨도 말 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한참을 가만히 있던 아가씨는 스웨터를 아무렇지도 않게 걷어올려,
그 사이 또 구워진 마음을 뚝, 잘라내어
쟁반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나는 간신히 참고 있던 눈물을 한없이 쏟았습니다.
내가 꺼이꺼이 소리까지 내며 청승맞게 우는 동안에도, 아가씨의 마음은
다시 고소한 내음을 풍기며 새롭게 구워지고 있었습니다.
그 후로 나는, 과자라곤 입에 댄 적이 없습니다.

영진공 도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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